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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삶의 온기 3월호에 실린 글 "여보, 해 봐요."

cook2piano 2023. 1. 20. 08:28

15년 전쯤 나는 대학원 박사 과정을 마치고 대학교수 공채 시험을 치렀다. 최종 총장 면접을 끝내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응원을 받고 있었다. 결과는 낙방, 쓰라린 고배를 마시고 참 많이도 울었다.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였고, 두 번째 사춘기가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책꽂이에 가득 꽂힌 컴퓨터 관련 전공 서적을 보면서 나는 그 책들을 모두 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짜 나를 찾기 위해서였다. 친구에게 1톤 트럭을 빌려 짐칸에 전공 서적을 모조리 싣고 나니 웬일인지 눈물이 났다. 20대 초부터 모았던 그 책들의 값어치는 돈으로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결심한 대로 어느 대학의 도서관에 모든 책을 기증했다.

 

마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방황하기에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게다가 책임져야 할 자녀가 두 명이나 있는 가장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인공 지능을 전공한 이유를 찾고 싶었고, 전공 분야에서 밥벌이는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전공과는 무관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처음 목표는 100일 동안 33권의 책을 읽는 것이었는데 거뜬히 달성했다. 다음 목표는 1년에 365권의 책을 읽는 것으로 정했다. 매일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은 하루의 모든 시간을 독서에 사용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는 꼭 해 내고 싶었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잠도 줄여 가면서 책을 읽었다. 그렇게 독서에 빠져 있던 중에 책 속의 한 문장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짧은 문장이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대학교수라는 직함을 얻기 위해 애쓰느라 대학원 시절에도 졸업 후에도 무척 힘들었다. 그로 인해 방황이 시작되었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일을 계기로 내가 진짜 원했던 꿈이 생각났다. 도전하지 않으면 오래도록 후회할 것 같아 용기를 내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여보, 내가 지금 이 일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 같아.”

여보, 해 봐요.”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했는데 아내는 그저 나를 지지해 주었다. 은행에서 빚을 내어 1년 생활비를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그때 아내의 마음은 어땠을지, 또 나는 어쩌면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놀랍기만 하다.

 

아내의 격려와 나의 용기가 시너지를 내어 꿈을 이룰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쉽지 않았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도전의 결과는 실패였다. 하지만 나에게 그 시간은 실패로 남아 있지 않다.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했고, 꿈을 향해 도전해 보았기 때문이다. 황홀했던 도전의 시간을 지나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나를 되돌아본 시간 덕분이었을까, 이후부터 나는 지금 걷고 있는 길 위에서도 이따금 가슴이 뛰곤 한다.

 

나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 준 아내 덕분이다. 누군가는 객기에 가깝다고 보았을 나의 용기에 한 번 해 보라며 힘을 실어 주었던 아내의 마음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아내에게 뒤늦은 고백을 전하고 싶다. “여보, 사랑합니다.”

김지수 님광주시 광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