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6 나는 사랑 때문에 자신을 압박하는 사목자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온갖 간청과 기대를 충족해주어야 한다. 그들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온갖 간청과 기대를 충족해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그들은 사랑으로 예수님을 따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사랑 안에서 예수님처럼 자유롭지 못하다. 예수님은 홀로 하느님과 머물러 있기 위해 사람들에게서 자유롭게 물러나기도 하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간청을 충족해야 한다는 강요를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간청에 반응하셨던 장면에서 나타난다. 그 여인은 자신의 관심사를 반응하셨던 장면에서 나타난다. 그 여인은 자신의 관심사를 위해 예수님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마르, 7, 24). 우리의 사랑은 내적 자유에서 나오기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 어디에서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강박은 간혹 두통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사랑이 내적 자유에서 흘러나온다면, 일반적으로 두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육체는,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지 아니면 우리의 참여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말하자면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타인을 실망시키고 그들의 사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의해 이루어졌는지를 알려주는 정직한 지표이다. 우리의 사랑이 자신의 필요와 타인의 기대에 따른 강박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이것으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봉사 자체가 아니라 봉사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표상이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p.52 크리소스토모는 자신의 실례를 다음 결론으로 마무리 한다. "그러므로 재산의 손실도, 중상과 욕설도, 추방도, 질병도, 고문도, 모든 사람이 최악이라고 간주하는 죽음도, 이것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유익을 가져다준다면, 어떤 사람이 이러한 것으로도 상처를 받지 않는다면, 무엇을 통해서 - 그대는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 상처를 입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반대의 경우를 증명해보고 싶다. 곧 가장 많이 상처를 입고 침해를 받고 불행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모든 것을 스스로에게 행한 것임을 증명하고 싶다"(465 중간). 그런 다음 크리소스토모는, 스스로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입힌 예로 카인,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던 필리포스의 아내, 요셉의 형제들을 거론한다. 그들은 모두 타인들에게 저지른 불의를 통해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 이어서 크리소스토모는 후렴처럼 반복하여 이렇게 말한다. "상처를 입는 자는 타인에 의해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의해 상처를 받는 것이다"(465 아래). 크리소스토모는 감옥, 돌팔매, 채찍질, 추적, 난파, 굶주림과 목마름 등 많은 것을 견디었던 바오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탄식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했고, 그것을 자랑했다. '나는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콜로 1, 24)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 3)."
p.103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거슬러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 예수님의 말씀은 선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끄시는데, 그것이 본질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토모에 따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p.175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상실한 우리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신을 찾고 있는지, 물품을 넘치게 공급하여 무한히 풍족하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세상을 거듭 현혹시켜 어떻게 공허함과 냉혹한 이성으로 신을 대체하려는지를 설명한다. "소비는 타락한 종교, 사물이 끝없이 부활한다는 믿음이다. 그 교회는 슈퍼마켓이고 복음은 광고이다"(Bruckner 57)". 모든 욕구가 충족될 것이라는 약속은 거룩한 것에 대한 우리의 깊은 갈망을 대체하고 있다.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 사람은 소비라는 대체 종교가 필요하지 않다. 그런 종교에서 우리는 헛된, 노력을 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이 책에선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말한다. 나는 이 책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 바로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멘.